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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좋아하는 사람치고 벤허라는 제목을 모르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 같다. 다만 대부분 딱 하나, 전차 경주 장면만 떠올린다는 게 좀 아쉽다. 상영 시간이 세 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라 전차 경주는 사실 후반부 한 장면일 뿐이고, 그 앞뒤로 배신과 복수, 신앙 같은 무거운 얘기가 계속 쌓여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액션 대작이라기보다 우정이 어떻게 무너지고 그게 어떻게 되돌아오는지를 다룬 이야기로 보는 쪽이 더 맞는다고 생각한다.
내용: 적의 아들로 살았다
로마 해군 사령관 퀸투스 아리우스는 갤리선에 쇠사슬로 묶인 벤허에게 "우리가 널 살려두는 건 이 배를 위해 노를 젓게 하려는 것뿐이다. 노를 잘 저어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말한다. 짧은 대사인데 이 영화가 하려는 얘기를 미리 요약해 놓은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조건부라는 얘기니까. 사실 벤허는 유대의 귀족이었다가 어릴 적 친구였던 로마 장교 메살라의 손에 누명을 쓰고 이 배까지 끌려온 처지였다. 지붕 기와가 떨어져 로마 총독이 다칠 뻔한 사고였을 뿐인데, 메살라는 옛 우정 대신 자기 출세를 택하고 벤허와 그 가족을 처벌해버린다. 그러다 벤허가 해전에서 아리우스의 목숨을 구해주면서 양아들로 입양되는데, 이 관계가 없었다면 뒤에 나오는 복수극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생각보다 비중이 크다. 게다가 벤허는 로마식 전차 경주 기술까지 배워서 로마 시민 신분으로 돌아오는데, 복수를 하러 가는 길이 이렇게 멀리 돌아가는 구성이라 오히려 뒷심이 붙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수의 손에서 배운 기술로 원수와 대결하게 되는 셈이니, 뒤에 나올 전차 경주가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이 관계의 결말이라는 무게를 미리 깔아두는 장면이기도 하다.
요약: 누명을 쓰고 노예가 된 벤허가 로마 사령관 아리우스의 목숨을 구해 양아들이 되고, 원수에게 배운 전차 기술로 훗날 메살라와 맞서게 되는 발단이다.
촬영비화: 사고가 명장면이 됐다
사실 이 영화 자체가 벼랑 끝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MGM은 극장 사업 분리와 텔레비전 경쟁으로 재정 위기에 몰려 있었고, 예산은 처음 700만 달러에서 촬영 시작 무렵 1,500만 달러 넘게 불어나 당시 기준 역대 최고 제작비 영화가 됐다. 전차 경주 장면은 로마의 치네치타 촬영소에 실제 경기장 크기 세트를 짓고 5주 가까이 촬영했다고 한다. 이 장면 하나에만 100만 달러 넘게 들어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스턴트 감독 야키마 카누트가 동물 안전을 직접 챙긴 덕에 말은 한 마리도 다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게 더 놀라웠다. 저 정도 규모의 충돌과 전복 장면을 컴퓨터그래픽 없이 실제로 찍으면서 말을 지켰다는 건 지금 기준으로 봐도 대단한 일이다. 다만 사람은 사정이 좀 달랐다. 카누트의 아들이자 벤허의 대역이었던 조 카누트가 촬영 중 전차 밖으로 튕겨 나가 턱을 다쳤는데, 그 장면이 오히려 너무 생생해서 그대로 영화에 쓰였다고 한다. 실수가 명장면이 된 셈인데, 이런 뒷이야기를 알고 보면 장면이 다르게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도박은 성공해서, 벤허는 그해 최고 흥행작이 됐고 휘청거리던 MGM도 한숨 돌렸다.
요약: 스턴트맨 조 카누트가 촬영 중 실제로 다쳐 튕겨 나간 장면이 그대로 영화에 쓰이면서, 사고가 벤허를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남았다.
결말해석: 가족은 살아 있었다
전차 경주에서 크게 다친 메살라는 죽어가면서 벤허에게 "끝난 게 아니야, 유다. 경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고 말한다. 사실 그는 자기 전차 바퀴에 몰래 칼날을 달아 벤허를 해치려 했지만, 오히려 그 칼날 때문에 자기 전차가 부서지며 부상을 입은 참이었다. 그러고는 벤허가 죽었다고 믿었던 어머니와 누이가 사실 살아 있으며 나병 환자 계곡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마지막 선물처럼 던진다.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오히려 더 깊은 절망이 시작되는 구조인데, 이 대사 한 줄이 그 반전을 다 담고 있다. 처음 볼 때는 그냥 통쾌한 복수극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메살라가 죽어가면서까지 상대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쪽이 더 오래 남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11개 부문을 가져간 것도, 이후 수십 년간 그 기록과 같은 자리에 겨우 두 편만 올라섰다는 것도 알고 나면 그냥 스펙터클로만 보기 어려워진다. 원작 소설의 부제가 "그리스도 이야기"인 이유도 뒤로 갈수록 드러나는데, 벤허가 예수의 처형 장면을 지켜보며 복수심을 내려놓고, 어머니와 누이의 병까지 낫는 결말로 이어진다. 통쾌한 승리로 끝날 줄 알았던 이야기가 용서 쪽으로 방향을 트는 걸 보면서, 이 영화가 그저 스케일만 큰 대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