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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작은 농업 국가로 알려진 와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금속 비브라늄과 그것으로 이룩한 첨단 문명이 숨겨져 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블랙 팬서는 아버지를 잃고 왕위에 오른 티찰라가, 자신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낯선 도전자와 맞서는 이야기를 그린다. 마블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처음엔 화려한 와칸다의 풍경과 아프리카 문화를 담은 의상, 음악에 눈과 귀를 빼앗겼다. 그런데 이 영화가 오래 남는 이유는 그 화려함보다, 악당이 던진 질문이 생각보다 쉽게 반박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갈등구조: 숨을 것인가, 나설 것인가
티찰라와 킬몽거의 대립은 단순한 왕위 다툼이 아니다. 두 사람은 와칸다가 세상을 향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두고 정반대의 답을 갖고 있다. 와칸다는 수백 년 동안 자신의 기술과 부를 숨겨왔다. 외부의 침략과 착취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사이 바깥세상에서는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노예제와 식민 지배, 차별 속에서 고통받았다. 미국 오클랜드에서 자란 킬몽거는 바로 그 고통을 직접 겪으며 자란 사람이다. 그는 와칸다의 무기를 세계 곳곳의 억압받는 흑인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을 억압해온 자들을 무너뜨리겠다고 말한다. 반면 티찰라는 처음엔 전통대로 와칸다를 지키는 게 왕의 의무라고 믿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갈등에서 킬몽거의 문제 제기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와칸다는 정말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해왔다. 문제는 그가 내놓은 해법이 또 다른 폭력과 지배였다는 점이다. 숨는 것도 답이 아니고, 무기를 들고 정복하는 것도 답이 아니다. 이 영화의 갈등은 그 두 극단 사이에서 세 번째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요약: 기술과 부를 숨겨온 와칸다의 고립주의를 지키려는 티찰라와, 억압받는 흑인들에게 무기를 나눠 세상을 뒤엎으려는 킬몽거의 대립은 숨는 것도 정복하는 것도 아닌 세 번째 길을 찾는 과정이다.
상징: 조상의 땅에서 마주한 아버지
와칸다의 왕은 하트 모양의 약초를 먹고 의식을 치르면, 조상들이 머무는 영혼의 땅에서 선대 왕들을 만날 수 있다. 티찰라가 그곳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보랏빛 하늘 아래 표범들이 나무 위에 앉아 있는 넓은 초원이다. 그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 티차카를 만나 왕의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킬몽거가 같은 의식을 치렀을 때 그가 도착하는 곳은 전혀 다르다. 그곳은 오클랜드의 낡은 아파트,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살던 좁은 방이다. 그리고 그 방에서 그는 와칸다의 왕자였지만 티차카에게 죽임을 당한 자신의 아버지 은조부를 만난다. 곱씹어볼수록 이 대비가 날카롭다. 똑같은 의식을 치렀는데, 한 사람은 왕들의 초원에, 다른 한 사람은 버려진 아이의 방에 도착한다. 조상의 땅은 결국 그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를 비추는 거울이다. 은조부는 어린 아들에게 와칸다의 노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들려줬지만, 킬몽거는 그 노을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가 가진 건 아버지를 잃은 상처와 버림받았다는 분노뿐이었다.
요약: 같은 의식을 치른 티찰라는 선대 왕들의 초원에서, 킬몽거는 오클랜드의 낡은 방에서 아버지를 만나며, 조상의 땅은 각자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주제: 다리를 놓는 왕
마지막 결투에서 티찰라는 킬몽거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그리고 죽어가는 그를 데리고 와칸다의 절벽 위로 올라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노을을 함께 바라본다. 티찰라는 그를 치료해주겠다고 하지만, 킬몽거는 거절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말을 남긴다. 나를 바다에 묻어달라고, 노예선에서 뛰어내린 조상들처럼, 속박 대신 죽음을 택했던 그들처럼. 그 말은 티찰라를 깊이 흔든다. 그리고 그는 와칸다의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킬몽거가 자란 오클랜드의 건물을 사들여 와칸다 최초의 국제 지원 센터를 세우고, 유엔에 나서 와칸다의 진짜 모습을 세상에 공개한다.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위기의 시대에 현명한 자는 다리를 놓고, 어리석은 자는 벽을 쌓는다고. 이 결말이 의미 있는 건, 티찰라가 결국 킬몽거의 질문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의 방법은 거부했지만, 그의 분노가 가리킨 상처만큼은 외면하지 않았다. 악당이 남긴 질문에 영웅이 다른 방식으로 답하는 영화. 그게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