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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정체성, 메타포, 성장서사)

J Movie Log 2026. 9. 16. 19:38

목차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지브리 작품 중에 어릴 때 봤을 때와 어른이 되어 다시 봤을 때 느낌이 이렇게 달라지는 영화도 드물다. 그래서 이번엔 이야기 진행보다,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상징과 성장의 의미를 중심으로 다시 들여다봤다.

     

    정체성: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

     

    치히로가 온천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겪는 건 이름을 빼앗기는 일이다. 마녀 유바바는 계약서에 서명한 치히로의 이름에서 두 글자를 지우고 '센'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인다. 치히로라는 이름이 끝없는 깊음이라는 뜻을 가진 데 비해, 센은 그냥 숫자 천을 뜻한다. 의미를 지닌 존재에서 언제든 대체 가능한 숫자로 바뀌는 셈이다. 실제로 유바바의 온천장에서 일하는 이들은 저마다 이름을 빼앗긴 채 일하고 있는데, 이는 이름을 잊는 순간 자기가 원래 누구였는지도 잊고 이곳을 영원히 떠나지 못하게 된다는 설정과 맞물린다. 그래서 영화 후반, 치히로가 하쿠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이 치히로라고 말하는 순간은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라, 이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흥미롭게도 하쿠 역시 자신의 원래 이름을 잊은 채 유바바 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치히로가 그의 진짜 이름인 니기하야미 고하쿠누시를 기억해 낸 순간에야 비로소 하쿠는 자유를 되찾는다. 결국 이름을 지켜주는 행위가 서로를 구하는 방법이 되는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설정이 지금 다시 봐도 섬뜩하다.

     

    요약: 온천장에서 이름을 빼앗기는 설정은 정체성을 잃는 것에 대한 은유이며, 치히로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되찾는 순간은 자아를 지키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메타포: 돈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

     

    치히로의 부모님은 낡은 마을을 발견하고는 아무 허락도 없이 음식을 먹어치우다가 돼지로 변해버린다. 돈만 있으면 뭐든 괜찮다는 태도가 그대로 벌을 받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이 자본주의에 대한 은유는 얼굴 없는 요괴 가오나시를 통해 한 번 더 반복된다. 가오나시는 온천장 손님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금을 뿌려대지만, 정작 치히로는 그 금을 받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건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돈으로만 표현하려던 가오나시는 거절당하자 폭주하며 주변을 집어삼키는데, 이 장면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마음은 텅 비어버린 현대인의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다. 온천장에 찾아오는 손님 중 하나인 오물신도 비슷한 결의 은유로 읽힌다. 처음엔 그저 더럽고 냄새나는 손님으로 등장하지만, 치히로가 정성껏 씻겨내자 그 안에 쌓여 있던 온갖 쓰레기가 빠져나오면서 원래는 맑은 강의 신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오염된 강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설정 자체가, 인간이 자연에 무심코 쌓아온 것들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요약: 부모가 돼지로 변하는 설정과 가오나시가 금을 뿌리는 장면은 모두 돈으로 채울 수 없는 결핍을 다루는 자본주의 비판의 메타포로 읽힌다.

     

    성장서사: 두려움 앞에서 배운 것

     

    영화 초반의 치히로는 낯선 상황 앞에서 계속 겁먹고 울먹이던 아이였다. 그런데 온천장에서 일하며 가장 험한 손님인 오물신을 정성껏 씻겨내고, 폭주한 가오나시를 진심으로 대하고, 하쿠의 본래 정체를 되찾아주는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이 성장은 거창한 능력을 얻는 방식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의 변화로 그려진다는 점이 특징이다. 마지막에 부모님과 함께 인간 세계로 돌아가는 치히로는 겉모습은 그대로지만, 더 이상 처음의 겁먹은 아이가 아니다. 재미있는 건 터널을 빠져나온 부모님은 그 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직 치히로만 그 시간의 기억과 변화를 온전히 안고 돌아온다. 이 비대칭이 오히려 이 여정을 온전히 치히로만의 성장담으로 만들어준다.그런점에서 나는 이 성장이 화려한 사건보다 작은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졌다는 점이 이 영화를 오래 곱씹게 만드는 이유 같다.

     

    요약: 치히로는 낯선 세계에서 마주친 상황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면서, 겁먹은 아이에서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