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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일제강점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일본인 귀족 아가씨와 그 재산을 노리는 사기꾼 백작, 그리고 백작의 계획에 따라 하녀로 들어간 소매치기 소녀. 박찬욱 감독의 이 영화는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를 바탕으로, 무대를 조선으로 옮겨 속고 속이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펼친다. 처음엔 화려한 미장센과 서늘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누가 누구를 속이는지 따라가기에도 바빴다. 그런데 이야기가 반 바퀴씩 돌아갈 때마다 앞에서 본 장면들이 전혀 다른 표정으로 뒤집힌다. 정교하게 짜인 사기극인 동시에, 억압을 뚫고 나아가는 두 여자의 해방기이기도 한 작품이다.
서사구조: 같은 장면, 다른 진실
영화는 세 개의 부로 나뉜다. 1부는 하녀 숙희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백작은 아가씨 히데코를 꾀어 결혼한 뒤 정신병원에 가둬 재산을 차지하려 하고, 숙희는 그 계획을 돕는 대가로 한몫을 약속받는다. 그런데 히데코와 가까워질수록 숙희는 흔들리고, 1부의 마지막에 정신병원에 갇히는 건 히데코가 아니라 숙희 자신이다. 2부는 같은 시간을 히데코의 시선으로 다시 보여준다. 사실 처음부터 히데코와 백작이 손을 잡고 숙희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좀 의외였는데, 2부에서 다시 보는 장면들은 대사 하나 바뀌지 않았는데도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1부에서 순진한 아가씨의 불안으로 보였던 표정이, 2부에서는 계획이 틀어질까 두려운 공모자의 표정이 된다. 그리고 3부에 이르러 두 여자는 다시 한번 판을 뒤집는다. 같은 장면을 다른 시선으로 반복하는 이 구조는, 진실이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를 보여준다. 관객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세 번 속는다. 그리고 그게 이상하게 즐겁다.
요약: 숙희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1부와 같은 시간을 히데코의 시선으로 되짚는 2부를 통해, 같은 장면이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진실을 드러낸다.
상징: 서재와 장갑이라는 감옥
히데코가 사는 저택의 중심에는 이모부 코우즈키의 서재가 있다. 일본인이 되고 싶어 한 조선인 코우즈키는 희귀한 고서를 수집하며, 어린 히데코에게 그 책들을 낭독하도록 길러냈다. 손님들 앞에서 무표정하게 책을 읽는 히데코의 모습은, 그녀가 이 저택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이 아니라 수집품의 일부, 혹은 그 수집품을 소리 내어 읽는 도구. 히데코가 늘 끼고 있는 장갑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맨손으로 세상과 닿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처럼, 그 장갑은 그녀를 바깥 세계로부터 격리시킨 하나의 경계로 보인다. 되짚어보면 이 영화에서 해방은 늘 이 사물들을 부수는 장면으로 나타난다. 히데코와 숙희는 함께 서재로 들어가 책장을 쓰러뜨리고, 책을 찢고, 물에 담가버린다. 평생 히데코를 가두어온 세계를 두 사람이 손으로 직접 무너뜨리는 순간이다. 평생 손을 감싸고 살던 사람이 그 손으로 서재를 부순다는 것. 감옥이었던 사물을 버리는 것이, 곧 자신을 되찾는 일인 셈이다.
요약: 코우즈키의 서재와 히데코의 장갑은 그녀를 수집품처럼 가둬온 감옥을 상징하며, 두 여자가 함께 서재의 책을 부수는 장면은 그 억압의 세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해방을 보여준다.
결말해석: 서로를 구한 두 사기꾼
3부에서 히데코와 숙희는 백작마저 속인 채 함께 상하이로 떠나는 배에 오른다. 히데코는 남장을 하고, 숙희는 그녀의 하녀가 아니라 동행자가 되어 나란히 선다. 히데코가 숙희에 대해 남긴 고백, 자기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라는 말은 이 관계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낸다. 숙희는 원래 히데코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으러 온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녀를 저택이라는 감옥에서 끌어낸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히데코 역시 숙희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지만, 마지막엔 숙희를 구하러 돌아온다. 묘하게도 두 사람은 서로를 속이려다 서로를 구했다. 반면 남자들의 결말은 정반대다. 재산을 노린 백작과 히데코를 소유하려 한 코우즈키는 지하실에서 서로를 파멸시키며 함께 무너진다. 욕망으로 여자들을 가두려 했던 사람들은 결국 자기들끼리 갇혀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결말은 단순한 사랑의 승리가 아니라, 억압의 구조에서 벗어난 사람과 그 구조 안에 남은 사람의 운명이 갈라지는 장면처럼 보인다. 배 위에서 두 여자가 처음으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얼굴로 마주 보는 순간. 그게 이 길고 정교한 사기극의 진짜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