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얼마 전 홍콩 느와르 얘기가 나와서 오랜만에 영웅본색을 다시 봤다. 1986년 영화인데 지금 봐도 촌스럽지가 않다. 원래 1967년에 나온 흑백영화를 오우삼 감독이 다시 만든 작품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그런데 이 영화, 시작은 지금 남아 있는 화려한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알고 보면 무명에 가까웠던 배우들이 이 작품 하나로 완전히 다른 위치에 서게 됐는데,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화려한 총격전 못지않게 흥미로운 뒷이야기들이 많다.
캐스팅: 신문기사 한 줄 캐스팅
오우삼 감독은 1980년대 초반 몇 년간 다작으로 인한 번아웃에 빠져 있었다. 한때는 대만 이민까지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라고 하니, 이 영화를 만들 당시 그는 커리어의 벼랑 끝에 서 있던 셈이다. 게다가 마크 역에는 원래 무명 액션배우를 캐스팅할 생각이었고, 배역 비중도 크지 않았다. 그런데 지역신문에서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는 기사를 우연히 읽고, 그 주인공이었던 주윤발을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첫 만남에서 오우삼은 그에게서 현대에는 보기 드문 의협심을 느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이 제일 흥미로웠다. 캐스팅이 연기 테스트가 아니라 신문기사 한 줄에서 출발했다는 게, 요즘 기준으로 보면 거의 낭만에 가깝다. 무명 배우를 스타로 만든 게 오디션이 아니라 우연히 집어 든 신문 한 장이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고, 슬럼프에 빠져 있던 감독의 재기작이 이렇게 시작됐다는 것도 뭉클하다. 오우삼 본인도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자란 이력이 있다고 하니, 어쩌면 그가 주윤발의 선행에 유독 마음이 움직인 것도 우연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주윤발은 스타가 된 뒤에도 소탈한 생활을 이어가며 전 재산에 가까운 돈을 기부해 화제가 됐는데, 신문기사 속 인물다운 면모를 수십 년째 그대로 지켜온 셈이다.
요약: 슬럼프에 빠져 있던 오우삼 감독은 지역신문에서 장학금을 전달한 주윤발의 기사를 보고 그를 직접 만나 마크 역에 캐스팅했다.
연출: 담뱃불 붙인 지폐
마크가 이쑤시개를 물고 지폐로 담뱃불을 붙이는 장면은 지금도 영웅본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사실 이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주윤발은 적룡에게 밀리는 조연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짧은 몇 초짜리 장면 하나로 무게중심이 완전히 넘어갔다. 대사 한마디 없이 돈을 태우는 행동만으로 이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 보여준 셈이다. 개봉 당시 이 영화는 그 해 홍콩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고, 이후로도 검은 선글라스와 롱코트, 성냥개비를 씹는 습관까지 유행시키며 홍콩 누아르라는 장르 자체를 새로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훗날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할리우드 감독들도 이 영화의 스타일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참고로 마크가 썼던 선글라스는 알랭 드롱이 착용해 유명해진 브랜드 모델이었는데, 이 장면 하나로 국내외에서 품귀 현상까지 빚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이런 디테일 하나가 캐릭터 전체를 설명해 주는 경우가 실제로 많다. 화려한 총격전보다 이 짧은 동작 하나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게 재미있다. 이 영화가 나오기 한 해 전, 오우삼은 코미디 영화를 연출하며 배우로 출연했던 서극과 처음 인연을 맺었는데, 이때 형성된 두 사람의 협업 관계가 그대로 영웅본색 제작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요약: 지폐로 담뱃불을 붙이는 짧은 장면이 주윤발을 조연에서 주인공으로 끌어올렸고, 이 영화는 홍콩 느와르라는 장르 자체를 새로 열었다.
캐릭터해석: 연기는 연기일 뿐
장국영이 맡은 송자걸은 형을 부끄러워하고 자존심만 앞세우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캐릭터다. 감독과 서극은 아이돌 이미지였던 장국영이 이런 배역을 맡았다가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까 봐 오히려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장국영은 이건 연기일 뿐이라며, 관객에게 욕을 먹지 않는다면 그건 자기가 연기를 못한 탓이라고 담담하게 답했다. 개봉 당시 극장을 나선 소년들이 검은 선글라스를 사 쓰고 성냥개비를 질겅거리며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이 영화는 배우들의 이미지를 완전히 새로 만들어버렸다. 개인적으로는 이 짧은 일화가 배우로서 장국영을 다시 보게 만든다. 이미지 관리보다 캐릭터에 대한 확신을 우선했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영화 전체의 균형을 잡아줬다. 참고로 후속작인 영웅본색 2도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감독이 서극으로 바뀐 3편은 완성도와 흥행 모두에서 크게 아쉬움을 남겼다고 한다. 그만큼 오우삼과 이 세 배우가 만든 조합이 대체 불가능했다는 뜻일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스스로를 오우삼의 열렬한 숭배자라 밝힌 것도, 결국 이 첫 작품이 만들어낸 스타일이 그만큼 독보적이었기 때문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