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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법정 영화의 원형처럼 자주 언급되는 작품인데, 정작 법정 장면은 도입부 몇 분이 전부다. 나머지는 전부 좁은 배심원실 안에서, 열두 명이 한 소년의 유무죄를 놓고 언쟁을 벌이는 게 다다. 이렇게 단순한 설정만으로 지금까지 회자될 수 있었던 배경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화면 밖에서 벌어진 일들이 더 흥미롭다. 배심원들에게 끝까지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이유, 카메라가 영화 내내 조금씩 자리를 바꾼 방식, 그리고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고도 막상 극장에서는 힘을 못 썼던 사정까지 하나씩 짚어본다.
설정비화: 끝까지 이름이 없던 배심원들
영화를 보다 보면 이상한 점 하나를 눈치채게 된다. 열두 명의 배심원 중 누구도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서로를 "8번 배심원", "3번 배심원" 이런 식으로만 부르고, 실제 이름은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딱 두 사람 것만 스치듯 나온다. 원작인 레지널드 로즈의 1954년 TV 극본부터 이런 설정이었다고 하는데, 신원보다 입장과 논리에 집중하게 만들려던 장치였던 셈이다. 재판을 받는 소년의 인종이나 배경 역시 영화 내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이 영화를 지금 다시 봐도 낡았다는 느낌이 안 드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누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보다, 그 사람이 어떤 근거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에만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되니까. 8번 배심원 역의 헨리 폰다가 혼자 무죄 쪽에 손을 들고 나머지 열한 명을 하나씩 설득해나가는 과정도, 결국 이름이 아니라 태도와 논리로 사람을 보게 만드는 이 구조 덕분에 힘을 받는다고 느꼈다. 인물 이름 하나 지워버린 설정 하나가 이렇게까지 이야기 전체의 무게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다.
요약: 배심원들은 끝까지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만 불리는데, 이는 신원보다 논리와 태도로 사람을 보게 만들려던 원작부터의 장치였다.
연출: 서서히 내려온 카메라
이 영화는 촬영 장소가 사실상 배심원실 하나뿐이다. 이런 조건에서 지루해지지 않게 만든 건 감독 시드니 루멧과 촬영감독 보리스 카우프만의 카메라 운용이었다. 영화 초반에는 카메라가 눈높이보다 위에서 인물들을 내려다보다가, 중반으로 갈수록 눈높이로 내려오고, 후반 클로즈업에서는 오히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각도로 바뀐다. 렌즈도 처음엔 넓은 화각을 쓰다가 점점 망원 쪽으로 옮겨가면서 인물들 사이의 거리감을 서서히 좁혀놓는다. 이건 좀 의외였는데, 대사와 연기에만 기대는 영화라고 생각했다가 이런 계산된 장치를 알고 나니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첫 장면 하나를 찍는 데만 조명 준비에 일곱 시간이 걸렸고, 카메라 움직임을 열여덟 번이나 넣어서 8분짜리 롱테이크로 완성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2주간의 리허설을 거친 뒤 20일 안팎의 짧은 일정으로 촬영을 마쳤는데, 시간과 예산이 빠듯했던 것치고는 훨씬 더 치밀하게 설계된 셈이다. 내가 보기엔 좁은 공간, 적은 인원이라는 제약이 이 영화에서는 한계가 아니라 무기로 쓰인 것 같다.
요약: 카메라는 영화 내내 눈높이 위에서 아래로 서서히 내려오고 렌즈도 광각에서 망원으로 바뀌면서, 좁은 방 안의 긴장감을 시각적으로 쌓아 올렸다.
재평가: 본전도 못 건진 흥행
이 영화를 완성시킨 건 사실상 헨리 폰다의 결단이었다. 그는 주연을 맡았을 뿐 아니라 직접 제작까지 나섰고, 원작자 레지널드 로즈와 함께 자신들의 몫을 뒤로 미루면서까지 제작비를 34만 달러 정도로 낮춰 잡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완성한 영화인데, 막상 국내 흥행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평단의 반응은 뜨거웠는데도 극장에서는 제작비를 겨우 회수하는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까지 세 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정작 수상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이 대목에서는 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완성도로만 보면 그해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될 영화가, 흥행에서도 시상식에서도 결국 손에 쥔 게 없었던 셈이니까.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평가는 확실히 달라졌다. 2007년에는 미국 국립영화등록부에 보존 대상으로 등재됐고, 미국영화연구소가 꼽은 역대 법정 영화 순위에서는 투 킬 어 모킹버드에 이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개봉 당시의 성적표만 봐서는 이 정도로 오래 살아남을 영화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