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5주년 기념일 아침, 아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거실에는 부서진 탁자가 뒹굴고, 남편은 순식간에 전국이 지켜보는 용의자가 된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이 영화는 실종 미스터리로 출발하지만, 중반을 넘기면서 전혀 다른 장르로 탈바꿈한다. 처음엔 범인이 누구냐를 좇으며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이 부부가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해왔는지를 들여다보게 된다.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채, 결혼이라는 제도를 이렇게까지 서늘하게 해부한 영화는 흔치 않다. 캐릭터해석: 완벽한 아내라는 가면 사라진 아내 에이미는 부모가 쓴 인기 동화책 속 어메이징 에이미의 실제 모델로 자란 여자다. 책 속의 에이미는 언제나 현실의 에이미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현실의 딸이 첼로를 그만두면 책 속의 에이미는 신동이 되고, 현실의 딸..
전쟁 영화라고 하면 보통 거대한 전투 장면과 영웅적인 활약을 떠올리게 되는데, 샘 멘데스 감독의 이 영화는 두 명의 병사가 편지 한 통을 전하러 가는 여정 하나에 모든 걸 건다. 1917년 4월, 영국군 병사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독일군의 함정에 빠지기 직전인 아군 부대에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라는 임무를 받는다. 명령을 제때 전하지 못하면 1,600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게 되고, 그 안에는 블레이크의 형도 있다. 처음 봤을 땐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화면에 압도되어 숨 쉬는 것도 잊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기술적인 충격이 가라앉고 나면, 이 영화가 결국 한 병사의 아주 조용한 마음을 따라가는 이야기였다는 게 남는다. 연출해석: 끊기지 않는 시간의 무게 이 영화는 거의 전체가 하나의 긴 장면처럼 이어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연결한 서비스를 만든 사람이, 정작 곁에 아무도 남기지 못했다면 어떨까. 데이비드 핀처 감독과 각본가 에런 소킨이 만든 이 영화는 페이스북의 탄생을 다루지만, 성공 신화를 늘어놓는 영화와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처음엔 빠르게 쏟아지는 대사와 두 개의 소송이 교차하는 구성 때문에 따라가기 바빴다. 그런데 다시 보면 이 영화가 진짜 관심을 두는 건 코드도 돈도 아니고, 한 청년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얼마나 서툴렀는지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보인다. 가장 사교적인 발명품을 가장 외로운 사람이 만들었다는 역설. 이 영화는 그 한 가지 아이러니를 끝까지 밀고 간다. 캐릭터해석: 인정받고 싶은 천재 영화는 하버드 학생 마크 저커버그가 여자친구 에리카와 대화하다 차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세 개의 이름으로 나눠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배리 젠킨스 감독의 이 작품은 마이애미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란 소년 샤이론이 어린 시절, 청소년기, 성인기를 거치는 모습을 세 개의 장으로 담아낸다. 큰 사건이 연달아 터지는 영화도 아니고, 주인공이 말이 많은 인물도 아니라서 처음엔 조금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말수 적은 주인공 대신 화면의 색과 침묵이 훨씬 많은 걸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면, 장면 하나하나가 전혀 다르게 보인다. 조용한데 이상하게 오래 아프고,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움직이는 영화다. 성장서사: 세 개의 이름, 한 사람 영화는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세 이름으로 장을 나눈다. 왜소한 몸 때문에 리틀이라 불리며 따돌림당하던 소년은, 아이들을 피해 숨..
한때 슈퍼히어로 영화로 전성기를 누렸던 배우가 잊혀가는 자신을 증명하려고 브로드웨이 무대에 모든 걸 건다. 줄거리만 보면 퇴물 배우의 재기 도전기 같지만,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이 영화는 그 단순한 이야기를 훨씬 이상하고 불안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처음엔 끝없이 이어지는 카메라와 쉴 새 없이 두드려대는 드럼 소리에 정신이 없어서, 이게 코미디인지 비극인지조차 헷갈렸다. 그런데 한 번 더 보면 그 산만함이 전부 한 남자의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놓은 결과였다는 게 보인다. 웃기면서 서늘하고, 초라하면서도 묘하게 숭고한 영화다. 정체성: 가면을 벗지 못한 배우 리건 톰슨은 과거 슈퍼히어로 영화 버드맨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게 그 배역뿐인 한물간 배우다. 그는 레이..
거대한 조개껍데기 모양의 비행체 열두 대가 세계 곳곳에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SF인데 폭발도, 우주 전투도 없다. 대신 한 언어학자가 유리벽 앞에 서서 단어 하나를 가르치는 데 긴 시간을 들인다. 처음엔 이렇게까지 느려도 되나 싶은데, 마지막에 이르면 그때까지 본 장면들이 전부 다른 의미로 뒤집힌다. 테드 창의 중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가 원작인데, 두 번째로 볼 때 비로소 완성되는 영화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서사구조: 회상이 아니라 미래였다 영화는 루이즈가 딸 해나를 낳고, 키우고, 병으로 먼저 떠나보내는 장면들로 문을 연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이걸 과거라고 받아들인다. 딸을 잃은 슬픔을 안고 사는 여자가 외계인과의 소통이라는 임무에 불려 나간 이야기다. 영화 내내 불쑥불쑥 ..